<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현실 해결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아카데믹한 책이 아니다. 매우 중요한 관심사를 대변하는 한 사람이 온갖 정성을 기울여 한 줄 한 줄 쓴 책이다. 이 중요한 관심사란 서구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특히 히틀러와 나치) 사이에서 가치 투쟁을 벌이고 있는 두 대립적 정치 문화 투쟁에서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였다.
그는 '열린 사회'라는 개념을 권력이 제한되고 개인적 자유의 기초 위에서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핵심어로 삼았다.
"모든 것을 가장 명백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철학적 주제들의 범위는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책에서보다 더 폭넓은 것이다. 그것은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다루고 있으며, 윤리의 토대를 비판하고, 문명사에 새로운 빛을 던지며......, 현대 논리학의 문제를 다루며, 사회 과학적 방법론에 새롭고 실천적인 관점을 도입시키며...... 그리고 그것은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포퍼는 젊은 시절부터 전체주의적 사고와 대결해왔다.
그는 공산당이 이끄는 시위에 참가했는데, 유혈 시위의 희상자들은 미래에 도래할 필연적인 세계 혁명을 위해 죽은 것이라는 당 간부의 해명은 포퍼의 도덕적인 근본 신념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세계 혁명과 '필연적인 역사적 진보'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과 그것으 위한 인간의 희생은 필연적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는 그가 보기에 인간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었다. 결국 포퍼는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그는 그때부터 역사는 불변의 법칙에 의해 규정되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고, 또한 몇몇 선택받은 자들의 과제는 인간들을 '이끌어'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이해'를 시키는 것이라는 신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리츠 슐리크와 루돌프 카르나프를 중시으로 하는 유명한 빈 학파가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다음과 같은 주제에 관시을 쏟았다.
"과학적으로 확실한 인식론적 발전은 어떻게 이룰 수 있으며, 어떻게 과학적 이론과 비과학적 이론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1935년 <탐구의 논리>가 출판되었고, 이 책으로 그는 현대 과학 이론의 창시자가 되었다. 포퍼에 의하면, 세계에 관한 앎은 이론들을 경험과 직접 맞부딪치게 해서 경험에 맞지 않으면 그러한 이론들을 버리고 더 나은 이론들을 추구함으로써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포퍼가 말했듯이, 만약 이론들이 그러한 실패를 경험하고, 반증가능하다는 '실패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학문적인 것이다. 따라서 비판, 즉 반증 가능성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진보를 위한 동력이 되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 즉 구체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포퍼의 사유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공통적인 근본 신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공통적인 근본 신념 가운데 하나를 그는 '역사주의'라 명했다. 역사주의란 사회적, 역사적 진행의 법칙성과 예측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포퍼는 이러한 역사주의적인 사관과 전체주의적 위협 사이에서 밀접한 연관 관계를 보았다.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이며 국민의 운명적인 주인임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과학 이론적 인식을 역사와 사회학 그리고 정치 행위의 영역에까지 적용한다.
포퍼에 의하면 자연 과학적 법칙에 대한 학문적 요청과 비교될 수 있는 역사적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개별적인 역사의 추세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뿐이지, 19세기의 위대한 역사철학자인 헤겔과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전체로서의 역사의 진행을 결코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린 사회'라는 개념을 포퍼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에게서 차용했다. 동시에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영어권의 문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었다. '열린 사회'가 일상생활에서 의미하는 바를 포퍼는 뉴질랜드 체류에서 그리고 뉴질랜드로 오기 이전에 영국에서 보냈던 9개월의 체류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존엄성, 자유, 세계 개방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비판을 수용할 줄 아는 정치 체제에 대한 경험이었다. 포퍼는 자신이 계몽주의적 전통에 속한다고 보았다. 계몽주의적 전통은 인권의 보호와 관용 그리고 법앞에서의 평등을 강조한다. 이러한 이념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인간성의 철학자'인 칸트가 정초한 것이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제1권 <플라톤의 마술>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승된 국가 유토피아를 최초로 주장한 플라톤과 비판적이고 선동적인 대결을 한다. 제2권 <거짓 예언자>는 헤겔과 마르크스 그리고 역사주의에 대한 청산이다. 이 세명의 사상가 모두를 포퍼는 전체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그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저술할 때 항상 영감을 주었던 책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였다. 포퍼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세계와 '전체주의적'인 스파르타와 '민주주의적'인 아테네가 전쟁을 했던 그 시기의 그리스가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싸움의 대리인으로 두 명의 아테네 귀족 계층출신의 뛰어난 대표자인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철학자 플라톤을 들었다.
페리클레스는 열린 민주 사회를, 플라톤은 닫힌 계급 사회를 대변한다.
"단지 소수만이 정치적인 구상을 계획하고 관철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 페리클레스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여자거나 남자거나 그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통솔자 없이는 안 된다." - 플라톤
책의 의도는 플라톤과 그 추종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전통이 가진 가면을 벗겨버리고, 페리클레스적 전통 속에 있는 열린 사회의 원칙을 밝히며 그러한 원칙들을 방어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포퍼에게 매력적인 사상가이자 예술철학자이고 자신의 독자들을 사로잡는 공상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플라톤은 전체주의로 이끄는 위험한 안내자였다.
그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다르게 서술했다. 그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유를 지키는 강직한 대표자였으며,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전해주는 것처럼 국가적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엄성과 양심의 결정을 주장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포퍼에게 그는 '비판의 원칙'을 자신의 삶과 철학함의 추진력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포퍼에 따르면 오래된 아테네 귀족 가문의 후예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반대로 전통적인 계급 통치의 정당함을 처음부터 주장했다.
포퍼는 플라톤을 자신의 철학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변혁들이 정당하지 않다는 점을 발기길 원했던 (민주주의에) 실망한 보수주의자로 표현된다. 따라서 <국가>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는 이상적이고도 안정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설계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 질서 속에 이미 '정의의 이상'이 최종적으로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의 사회 설계는 인간의 평등이 아니라 자연적 불평등에 기인한다. 그러한 불평등은 생물학적인 것 뿐만 아니라 법적, 도덕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물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간은 더 많은 권한과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한 국가 내에 상이한 그룹 사이에서도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 정치철학의 이러한 서술은 그 당시 독자들에게 명백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더욱 분명한 시대적 사건들에 대해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포퍼가 보기에 플라톤은 나치의 인종 이론의 선행자이다. 그리고 포퍼는 '생물학적 인종 이론'의 책임이 플라놑에게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플라톤은 국가를 이끄는 소명을 지닌, 소위 '감호자'라 불리는 지배 계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테네에서는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오래전부터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귀족 계급의 통치에 대한 의문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감호자라는 지배 계층은 아테네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 과정에 대한 플라톤의 응답이었다.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우수한 인종에 대한) 생물학적인 선택과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감독되고 교육받은 새롭고 안정된 통치 계층이 양성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통치 계층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스파르타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통치 계층이 아예 모든 변화에 대한 시도를 그 싹부터 차단할 수 있고, 아테네 귀족주의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에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 '전체'였다. 그는 '유토피아적 사회 공학'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그의 사회 공학은 모든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하고 개인들에게 거대한 전체 설계도에 들어갈 역할들을 지정하는 것이다. 개인은 여기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사회라는 구성물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포퍼에 다르면 플라톤의 국가 설계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 근본 원리에 위배된다. 먼저 자유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개인주의'적 원리에 위배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보편주의'적 원리에도 위배된다. 포퍼에 따르면 열린 사회의 근본 원리는 계몽주의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톤의 동시대인들에 의해 대변되었다. 무엇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아테네에 살며 가르쳤던 소위 '위대한 세대'라 불리는 지식인 그룹이 그러한 기본 원리를 주장했다. 포퍼에 따르면 그들은 최초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위하여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했다. 이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아테네 민주주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들 수 있다.
포퍼는 제2권에서 이성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철학자들을 다루었다. '거짓 예언자' 헤겔과 마르크스는 역사주의의 고전적 철학자였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플라톤처럼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포퍼의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에 기초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 모든 사물 자체는 애초부터 확정된 목적으로 발전한다는 그의 이론은 헤겔과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합법칙적으로' 그것을 완성을 행햐가는데, 그 완성이 헤겔에게는 근대 국가에 있어 자유의 실현이었으며, 마르크스에게는 계급없는 사회였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 개인은 단지 상위 개념인 세계 이성의 수단에 불과했다.
과학 이론가 포퍼는 특히 헤겔에 의해 주창된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해 반발한다. 변증법에 의하면 진보란, 한 명제(테제)는 반명재(안티테제)와 투쟁을 하게 되고 두 명제는 하나의 종합으로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퍼에게 이러한 방법론은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상호 모순적 명제들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포퍼에게 헤겔은 '마술적인 변증법의 도움으로 순수한 형이상학적 원통에서 현실적인 실제의 토끼를 끄집어내는 논리의 마술사'인 것이다.
변증법의 법칙을 경제와 물질적 관계로 바꾼 마르크스에 대한 포퍼의 판단은 헤겔에 비해 한층 부드러운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유물론적이며 동시에 신비한 종교'이지만,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에는적어도 진정한 휴머니즘적 사상, 즉 사회 정의의 현실화가 내포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에 대해 예견했던 모든 것은 오류로 밝혀졌다. 자본주의 미래는 노동 계급의 빈곤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 혁명을 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포퍼에 의하면 열린 사회는 유토피아적 거대 기획이나 어떤종류의 역사 예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과학 이론의 근본원리와 정치철학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통해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그것의 토대를 역사적 합법칙성이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자기 책임에 둔다.
플라톤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물음은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나 포퍼에 의하면 이러한 물음은 완전히 다른 물음, 즉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사회적 정의를 촉진시킬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은 어떤 성질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반대 입장과 공개적 비판을 위한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정치가들의 잘못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포퍼의 민주주의 이론은 오늘날 '시민 사회'라고 불리는 것과 연관을 맺는다.
누가 통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을 평화로운 방식으로 다시 선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중요한 것이다.
포퍼는 거대하게 계획된 유토피아적 사회의 기획 대신에 개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개혁을 주장한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포퍼가 사용한 '점진적인 공학'이라는 개념을 독일어판에서는 '미완성의 개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는데, 이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것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인하는, '점차적으로' 전진하는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학문적 탐구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결코 닫혀질 수 없으며 최종적인 완전성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
포퍼는 '비판적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이러한 태도를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위에도 요구했다. 그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그가 창시한 철학적 방향을 나타내는 이름이었으며, 2차 대전 이후 몇십 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열린 사회 이론을 통해 대학보다는 오히려 사회에서 서구를 대변하는 철학적 목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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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정리하셨네요. ^^ 혹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라는 책 추천해도 될까요? 포퍼의 인간적인 면을 잘 부각시켰던데..
철학 좋아하시나 보네요~ ^-^ 나중에 시간나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