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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추출해 낸 칼뱅주의의 요소들 중에 아마도 그의 주장에 비추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설이다. 즉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저주로부터 구원받도록 선택되었으며 그 선택은 신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칼뱅 자신은 아마도 신의 예언의 도구로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했을지 몰라도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베버는 주석을 달기를 '그 극단적인 비인간성의 형태로 이 이론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엄청난 일관성에 빠져버린 한 세대의 삶에 한 가지 결과를 낳았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었다.' 베버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자본주의 정신이 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사목의 수준에서 두 가지 발전이 일어났다. 먼저 자신을 선택받은 자라 여기는 것은 의무적인 것이 되었다. 확신의 부재는 불충분한 신앙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속적 활동에서의 '선행'의 수행은 그러한 확신이 입증되는 매체로서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소명(직업)에서의 성공은 선택받은 자들 중의 하나라는 - 결코 그 하나가 되는 수단이 아니라 - '신호'가 되었다. 부의 축적은 그것이 착실하고 근면한 경력과 결합되는 한에서 도덕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즉 부가 지탄받는 것은 오직 그것이 게으른 사치나 자기 탐닉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경우뿐이다.
힌두교에도 금욕에 대한 중대한 강조가 존재하지만 베버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피안을 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교도주의에서처럼 이 세상 자체의 합리적 지배를 향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세계의 방해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것이다. 힌두교가 체계화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무역과 제조업이 인도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힌두교의 영향, 그리고 그와 결부되어 출현한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근대 유럽 자본주의와 비견할 만한 어떠한 경제성장도 효율적으로 봉쇄하였다. 베버는 '직업상의 모든 변화 그리고 작업기술에서의 모든 변화가 의례상의 귀결될 그러한 의례적 법률은 분명 내부로부터 경제적, 기술적 혁명을 야기시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내부
로부터'라는 말은 강력한 것이다. 즉 베버의 관심은 유럽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최초의 기원에 관한 것이지 결코 다른 곳에서 그것의 지속적인 채택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베버의 분석 중에 가장 명확하게 의문시되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루터교에서 '소명'개념의 독특성, 가톨릭과 규칙화된 경영활동간의 '친화성'의 결여라는 주장, 테제의 핵심인 칼뱅주의 윤리가 현실적으로 베버가 상정한 방식으로 부의 축적을 존엄시했던 데 기여한 정도 등이다. 만일 이러한 사항에서 베버가 틀렸다 해도 그의
저작들의 광범한 스펙트럼에 미칠 그 결과를 추적하는 일은 아마도 여전히 복잡한 일로 남을 것이다. 만족스럽게 그 일을 하려면 아마도 '세계 종교'에 대한 연속연구의 지위를 고려해야 하며 문화의 합리화라는 일반적인 문제 그리고 베버가 작업했던 방법론적 틀 등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어떤 저자도 아직 그러한 과제를 시도하지 않았고 아마도 어떤 성공의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시도하려면 베버 자신에 비길 만한 학문적 범위를 가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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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진리의 '상대성'에 대해,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적,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진리나 지식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보편적 '이성'활동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진리와 지식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지행합일설을 제시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실행할 때에 선하고 행복한 삶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생활 속에서 악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까닭이 무엇이 선하고, 옳고 그른지를 모르는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델포이 신전에 씌어 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자각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참된 앎을 통해 덕을 쌓아 갈 때에 비로소 행복을 누린다고 하였다. 이런 지덕복합일설은 앞에서 제시된 지행합일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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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아버지는 정재원으로 진주 목사를 지냈고, 어머니는 윤선도의 후손으로 해남 윤씨이다. 정약용의 집안은 남인파의 양반이었지만,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그다지 권세가 있지는 않았다.
태학에 들어가자 그는 임금인 정조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정조가 그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정조가 태학으로 '4.7이기론에 있어서 퇴계와 율곡의 이론적 차이'를 답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약용은 많은 학자들이 퇴계의 이론을 지지했던 것과는 달리 율곡의 이론을 지지했는데, 이것이 정조의 마음에 들어 칭찬을 받았던 것이다.
정약용의 학문은 매우 방대하지만, 집약하자면 '수기'와 '치인'의 정신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공자 이래 유학이 표방하는 기본 정신이다. 그런데 정약용의 시대에는 사회가 혼탁하고 학문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하여 이렇게 개탄했다.
"공자의 도는 수기와 치인일 뿐이다. 오늘의 학자들이 아침저녁으로 강론하는 것은 다만 이기사칠의 논변이거나 하도락서의 수이거나 태극원회의 설뿐이니, 이러한 것들이 수기에 해당되는지 치인에 해당되는지 모를 일이다."
이 말 속에는 형이상학에 매몰되어 있는 성립학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가 성리학을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성리학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나름대로의 이론을 정립했던 것이다. 다만 이전의 학자들과는 이론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정약용은 세계의 궁극적인 시원을 '태극'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보통 태극을 이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가 말하는 태극은 무형의 '이'가 아니라 물질적인 실체이다. 그에 따르면 태극은 '양의'를 낳는다. 양의란 하늘과 땅이다. 양의는 다시 사상으로 나뉘어 하늘, 땅, 물, 불을 낳는다. 그리고 사상은 여덟으로 분화된다. 즉, 하늘과 불이 작용하여 새로이 번개와 바람을 낳고, 땅과 물이 작용하여 새로이 산과 연못을 낳는다. 정약용은 이렇게 우주 만물은 태극의 분화작용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종래의 음양오행설을 부정했다.
정약용은 이처럼 '이'를 궁극적인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이'란 법칙으로서의 이치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주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자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상제'라고 했다. 상제란 고대중국에서부터 내려온 개념인데 정약용은 이를 보다 부연하여 다른 각도로 사용했다. 즉, 그에게서 상제란 곧 초월적인 유일신으로까지 이해되었다.
정약용의 인성론은 이전의 성리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는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성이 인간의 성품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실천을 통해 도덕적인 덕목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헛되게 태극이나 공경하고 이를 하늘이라 생각하면 '인'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서 성품이란, 그 자체로서 선한 어떤 것도 아니며, 다만 구체적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이다. 즉, 성품은 곧 '기호'이다. 이러한 주장을 성기호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기호가 있다. 하나는 영지의 기호로서 선을 즐기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도의의 성품이며 도심으로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형구의 기호로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동물도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서 기질의 성품이며, 인심이다.
정약용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민본주의 정치론을 폈다. 그에 따르면, 군주는 하늘의 명을 대행하는 자이지만, 그 하늘의 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덕한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덕을 잃으면 천명이 옮겨져 군주가 바뀌어야 하는데, 덕이 있고 없음은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를 말한다. 만일 군주가 덕을 잃으면 백성의 힘으로 군주를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맹자의 역성 혁명론과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권력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력이 백성으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한다. 그는 태고시절에는 백성만이 있었을 뿐 통치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백성들이 필요에 의해 군주를 추대하고 관직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백성의 뜻에 반하는 군주는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정약용의 정치사상은 맹자의 왕도정치보다 더욱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서양의 사회계약설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정약용은 경제의 근간이 되는 토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제도를 창안하여 '여전제'를 주장했따. 여란 약 30호로 이루어진 마을을 뜻하는데, 여기서 토지는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 경작하여, 수확량을 일한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공동 영농 제도이다.
목민심서는 지방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일들을 조목을 들어 자세하고도 예리하게 지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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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미 철학의 전개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만은 분명하며, 철학적 저작의 서술 양식이나 삶의 행로에 있어서도 여타의 철학자들과는 구분되는 매우 독보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유태계 철강 부호였던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과 어머니 레오폴디네 사이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일종의 재벌 2세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히틀러가 린츠에서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학년이 달랐고, 서로 접촉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17세가 되던 1906년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그 기술 전문대학으로 진학하여 기계 공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2년의 학업을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 대학에서 항공 공학을 전공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요소는 그의 자발적인 선택보다 아버지의 강압이나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 19세가 되던 해, 영국으로 건너온 루드비히는 비행기 엔진이나 프로펠러의 설계에 대한 연구에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수학의 기초'에 관한 러셀과 프레게의 책을 읽게 되고, 점차 수학의 기초론, 수리 철학, 논리학 등으로 관심을 전환하게 된다. 1911년 여름, 그는 독일의 예나 대학에 있던 프레게를 찾아갔다. 그리고 프레게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러셀에게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였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완벽한 천재의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몇 번의 굴곡을 거친 후에, 1922년 이후 이들의 인간적인 관계는 단절되었다.
1946년에는 그 유명한 포퍼와의 부지깽이 사건이 있었다. 1946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이 회장으로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 도덕 과학 클럽에 포퍼가 세미나 발표자로 초청이 되었다. 포퍼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가 실재한다'는 포퍼와 '철학적 문제란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비트겐슈타인이 포퍼에게 시뻘건 부지깽이를 들어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러셀의 제지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이 도망치듯 강연장을 빠져나갔다는 것이 이른바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그 날 참석한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내용이 약간씩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날 발표의 내용이 망므에 들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이 '도덕적 규범의 예를 하나 들어보라'고 질문하였고, 포퍼는 부지깽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비트겐슈타인을 향하여 '초청 연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이라고 응수했다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비트겐슈타인이 손에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내팽개치며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 사건의 대략적인 전모이다.
1951년 비트겐슈타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돌봐 주던 의사, 베반 박사의 집에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사람들에게 전해 달라(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는 말을 남기고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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